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안녕하세요. 팔층입니다.
사랑을 좇아가다 보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는 것이니 인사를 해야겠지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이야기로 당신의 시간을 조금만 빌려 가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첫 번째 레터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생각하다 저의 첫 기억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시와의 첫 번째 기억이요. 유년 시절 쓰던 ‘데굴데굴 도토리’ 같은 동시에서 벗어나, 현대시를 처음 제대로 접했던 순간으로 시계는 되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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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 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봐, 우린 언제나
서류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즐거운가, 과장을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가
김을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 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_ 기형도, <오후 4시의 희망>,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7, 3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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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어렸던 저는 이 문장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이해하지도 못하는 시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이 시가 풀지 못하면 터져 버리는 시한폭탄이 아닌,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부화할 계란 같았어요. 정말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시를 가지고 있던 시간이 길었습니다. 멋진 문장뿐 아니라 시 전체를 ‘드디어’ 읽게 된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실은 제대로 부화시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난한 시간을 쓸 만큼 어느 정도 아물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합니다.
각설하고, 머리가 커진 제가 이 시를 읽는 과정은 대략 이러합니다. (드물게 읽는 과정이 구체적인 시이기도 하군요.) 너덜너덜한 시집을 펼칩니다. 손때가 묻은 페이지에 도달합니다. 시를 읽습니다. 그리고 (혹은 와중에) 김 씨를 생각합니다. 김금희 소설에 나오는 조중균 씨 같은 김 씨를요. 그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빵 부스러기처럼 사무실에 박혀 있고. 회색 같은 김 씨의 얼굴 위에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뿌연 햇빛이 내립니다. 김 씨는 곧… 전혀 당황하지 않아서 당황한 표정으로 무너집니다.
강요된 무너짐 앞에서 무너지기를 선택하고 싶지 않아요. 그것이 도시의 질서라고 할지라도요. 차마 도시의 범법자가 될 용기가 나지 않을 때에는 어김없이 첫사랑을 찾습니다. 그럼 첫사랑은 제게 말합니다. 무릎 꿇는 자의 최후를요. 잔인하지요. 첫사랑은 도시의 질서를 수행한 그와 김 씨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김씨는 이 도시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면 오후 4시의 희망을 피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희망에 매달려 오지 않을 세계를 기다린다고 한들 이곳에 한 번 꽂히면 빠져나갈 수 없을 테니까. 이제 그는, 김 씨는 도시의 계획대로 무너지고 탈락합니다. 김 씨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책을 덮습니다. 이 시는 이제 퇴장합니다. 덩그러니 남은 저는 김 씨를 생각해요. 이 도시를 생각해요. 무너지고 있는 김 씨의 얼굴은 제게 사이렌 같아요. 탈락해야만, 무너져야만 하는, 죽음도 살 수 없는 이 도시 같은 세계를 살고 있는 내 머리 위로 빨간 사이렌이 울립니다. 마치 이 경고등이 남은 시의 역할이라는 듯이요. 기형도는 물러나고 없지만, 남은 시대를 살아가는 저는(어쩌면 우리는) 시가 끝나는 순간에서부터, 그 무너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이렇게 있을 수는 없겠다고. 사랑과 혁명은 괴사(壞死)된 지점을 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제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