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고삼 어니 냥입니다.
감히 어시사에 뻔뻔하게 도전장을 내밀기로 결심함과 동시에 바로 집구석 한켠에 케케묵어 있던 시집 두어 권을 꺼내 들었습니다. 살면서 시집을 손에 들어 본 적이 얼마나 있었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살면서 읽어본 시라곤 자이스토리와 마더텅 속의 시들과 한컴 타자 연습으로 익힌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다인 것 같습니다. 여튼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현재의 제 삶과 시는 입시 제도로 묶인 불가피하고도 메마른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 첫 시집을 읽기 시작한 지 30분 만에 큰 고난을 맞닥뜨렸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뒤로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도 답지나 친절한 해설이 없습니다. 작품의 주제와 정서, 작가의 배경 따위의 설명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어엔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12345중에 숫자 하나 고르는 것만 잘했지 답이 정해지지 않은 글을 이해하는 것에는 꽝인 저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혹여나 모자란 나의 감상으로 인해 시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납니다. 하지만 억지로 읽으시고 마음껏 오역하고 멋대로 행복하시라는 박정민의 한마디에 격려를 받아 부디 시가, 또는 시인이 저 같은 초보자에게 관용을 베풀어 줄 수 있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짧은 글을 적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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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언제 그치나… 그렇게 기다렸던 은화같은 비
나를 씹고 죽은 나를 내뱉는 사냥개 같은 비
죽어서도 자랄 머리칼 같은 비
뭐든 조만간에 지루해지지 더러워진 세탁물처럼
피비린내나는 외로움처럼
내일도 오늘과 같을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바심과 막연한 기대를 화투장으로 늘어놓고
나는 무엇을 기다리지
선인장 같은 거칠어진 목을 드러내놓고
충분한 식사와 生水와 외출복을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기기를 무릎에서 버섯이 피고
이불이 수목림으로 변하기를 아주 평범한,
지금과는 다른
아, 안개가 되려나봐… 내장까지 안개가
…인간은 안개 가득한 장롱…
기다림의 진화란 겨우 안개를 낳았군 독가스 같은 안개
늘 빈 몸이 불안해
몸통의 서랍마다 채워지길 기다리다가
기다림의 포대기로 인생을 얼싸안다가 안개로 꽈악,
기다림이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신념이지 아니, 점진적인
죽음 기다리는 시간은 버려진 가축이 되는 시간
줄곧 기다리며 살았어요 결국 없는 것을 기다리는 건
아닌지요 눈동자는 날아가는 원반이고
사지는 안개그을음투성이 점점 참을 수 없어
잃는다는 것 이곳에 산다는 것 잃기 마련인데
… 공포스럽군 … 끔찍해 기다림의 리얼리즘
나는 병들었어… 치유를 원해
이 병원엔
왜 이렇게 환자가 많지 누구도
제대로 기다리지 않아 완벽하게 기다리는 사람들
병원은 상여의 만장처럼 울부짖지
누구나 내부엔 환자가 기숙하지 사지 멀쩡한 우리는
자주 엄살을 부리죠 그걸 나는 인정해
…각자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기다리는 것
견디는 것
재즈 같은 나른함 속에
뭐 하나 제대로 된 결말도 없고
…불후의 기다림…
뭐든 끝장을 보구 싶다 쇠뿔을 움켜쥔 투우사의
피묻은 손처럼
-그런 다음엔
거울 속에 새 한 상자가 있군
…수저통의 포크처럼 조용하다
…어떻게 살아갈까
_신현림,「안개 장롱」(『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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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작년부터 좋은 사람의 불편한 구석을 발견했을 때의 불쾌함을 자주 느끼곤 했습니다. 분명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 맞는데... 가끔씩 눈에 밟히는 내 사람들의 행동들을 보고 있자니 심란했어요. 하지만 시인의 말이 그러했듯이 누구나 내부엔 환자가 기숙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낫습니다. 그 사람들도 아마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을 테니까요. 내가 했던 행동들도 누군가에겐 그저 고등학생의 어리숙한 엄살 정도로 보였을까 싶어 부끄럽습니다. 결국 나도 타인도 같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에 위안을 받습니다.
너무나도 부실하고 미약한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이유도 없이 그저 어른이 되면 단단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전 영화 주인공 같은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아, 지금 나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에서 초 위기 씬을 찍고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언젠가 좀 더 쿨하고 멋진 사람이 되는 날이 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면서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 그런 날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평생 그 이벤트가 일어나길 기다리기만 하다가 삶이 끝나버리면? 앞으로의 삶은 아마도 기약 없는 기다림의 연속일 것이라는 생각에 아득해지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제대로 해결한 것이 없는 것만 같고 모든 것이 내 손을 떠난 것만 같은 무기력함이 찾아오는 날이 여러분도 있으신가요. 그때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생각에 휩싸여 고뇌하시진 않나요. 다가올 미래를 잠자코 기다리는 일은 생각보다 더 진 빠지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주체적 성인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날들입니다.
화창한 날씨가 점점 자주 찾아옵니다. 싱그러운 햇살의 웃음을 벗 삼아 하루를 더 살아 나가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만나는 날에는 더욱 따뜻한 하루가 되어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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