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또 다른 안녕(hi)을 위해 잠시 안녕(bye)
하이하이 선모입니다
날이 추워요! 그리고 연말이 다가옵니다. 게다가 최근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죠. 요즈음은 지긋지긋한 것들과의 헤어짐과 새로운 것들과의 만남이 수없이 교차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년의 이맘때 저는 어쩐지 한 시절이 끝나고 또 다른 시절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 점점 무던해지기 시작했는데요, 학교를 졸업하고, 수능을 치르고, 스무 살을 맞이하고, 또 다른 학교에 입학하고서도, 저는 늘 그곳이 벼랑 끝이 아니라 건너편으로 가기 위한 횡단보도를 건너는 거 같았어요.
어느 한 편의 시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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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눈이 사라지는 순간의 평화와 같다
모래에 닿는 해변의 파도와 같다
사랑과 같다
크림과 같다
사람은 죽는다
그 사람 형상이 내 안에 남아서 아름다울 때
식초와 키위, 파인애플을 밥처럼 먹는다
목과 위가 언어처럼 위태롭도록
안에서부터 벽을 녹여 장화를 신도록
우리는 함께 사랑으로 시간을 뚫었다
모루가 녹아도 그 사실은 빛날 것이다
_고명재, 「연육」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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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억력을 믿지 않습니다. 어느 시절이 존재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기록은 어쩐지 거짓말 같고, 감정은 금방 휘발되어 찾을 수 없는 지구 반대편 이름 모를 섬나라에 도달해 있을 것 같아요. 숨이 벅차오를 만큼 끌어안았던 마음도 손에 잡을 수 없어 그대로 흘려보내면 전 무언갈 가졌던 적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 고명재 시인은 연육 작용과 함께 시간을 거스르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연육 작용은 목과 위 뿐만이 아니라 심장께 어딘가에 매달려있는 사랑의 형상까지 모조리 녹여버립니다. 크림처럼 부드러워진 몸 안은 위태롭지만, 분해된 단백질과 흔적도 없이 녹아내린 사랑은 어쩐지 영원할 것만 같아요. 사랑하는 이가 죽어도, 시간이 흘러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영원히 세상 어딘가에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파인애플을 먹어 혀가 따가운 이유는 어쩌면 시절을 거스른 대가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어느 시절의 종말과 함께 그 시절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나만이 생생하게 기억하던 마음을 나마저 잊어버리면 영영 없던 것이 되어버릴까 봐 과거를 지나치게 불신하고 배신합니다. 초음파를 찍어도 심장에서 잔뜩 굴렀던 사랑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헤어짐을 잊기 위해 만남을 잊었고, 결국 시절에 무던해졌습니다.
여전히 만남을 의미하는 인사와 헤어짐을 의미하는 인사가 똑같다는 사실이 이상합니다. 후회 없는 마음이라는 게 있다면 세계의 종말 끝에서도 또 다른 안녕을 기약하며 반갑게 인사할 수 있을까요? 파인애플을 밥처럼 먹어 사랑을 영영 간직할 수 있을까요?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시절에 무던하고, 기억력은 믿지 않지만 여전히 사랑에는 관대하고, 새로운 시작에 설레고 싶기 때문이거든요.
시작은 언제나 끝을 함께 데려오지만, 그래도 우리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이유는, 여전히 시작이라는 말에 가슴이 설레는 이유는, 만남을 의미하는 인사말과 헤어짐을 의미하는 인사말이 같은 이유는 우리는 언제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마음보다 다음 만남에 거는 기대가 더 크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시절을 보존할 수 있다는 아직은 얄팍한 믿음까지 같이 안고 가면 더 좋을 거 같아요.
이 글을 쓰는 며칠 사이 날씨가 무서울 정도로 추워졌어요. 이제 정말 완연한 겨울이 왔어요.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즐거운 인사말로 시작한 이 글도 아쉬운 마무리를 내야겠습니다. 아쉬워하고 있다 보면 언젠가 또다시 안녕하고 반갑게 마주칠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헤어짐이 아쉬워도 연육 작용의 힘을 믿는다면, 고명재 시인의 달콤한 구절들에 넘어갔다면 우리는 이제 다가올 또 다른 안녕(hi)을 위해 잠시 안녕(bye)해야겠습니다.
모쪼록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 각자의 시절들과 후회없이 작별하고, 더 새로운 만남을 맞이하시길 바라요. 추위 대비하여 옷 단단히 입으시고, 붕어빵 많이 드시길 바라요 ㅎㅎ 언젠가 다시 만날 날까지!
즐거웠어!
또 보자(또 보자는 말을 제가 요즘 참 좋아합니다 ㅎㅎ)
바이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