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말지입니다. 길었던 여름을 보낼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낙엽을 쓰는 빗자루 소리로 분주한 계절이 찾아왔어요. 환절기마다 감기를 크게 앓는 저는 늘 그렇듯 먼지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며 집을 갈아엎는 대청소를 끝냈고 오늘 밤엔 차렵이불과 극세사이불을 모두 빨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성인이 되고 한 집에 5년째 머무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 전월세 계약 기간에 따라 또는 직장에 따라 ‘내 집’을 옮겨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 적어도 제 주위에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이 집에 오래 살고 있는 걸 아는 지인들에게 ‘그 집이 엄청 마음에 드나 보다’, ‘처음부터 되게 잘 구했다’ 같은 말을 듣곤 하는데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아요. 대신 알게 된 몇 가지가 있습니다.
비가 오면 어디에 웅덩이가 생기는지 알아서 한 걸음쯤은 크게 걸어 신발이 잠기는 걸 피하고 눈이 오면 어디쯤 빙판이 되는지 알아서 잰걸음을 걷는 것, 3월/9월엔 대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커지겠구나 싶고 명절 연휴엔 오늘의 밤이 어느 때보다 어둡겠구나 싶은 것, 음식 메뉴별로 즐겨 찾는 가게가 하나쯤은 생기고 편하게 업무를 보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 좌석이 생기는 것
또 이 동네에 한동안 머물다 떠나간 친구들이 이곳을 그리워할 때 난 아직 거기에 살고 있다고 한 마디쯤 웃는 것 따위가 꽤 즐겁다는 것. 혼자 남겨진 이 동네는 여전히 활기가 넘쳐서 이 거리를 있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에 여기서의 내가 ‘낭비되지 않는’ 느낌을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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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면
물이
무릎까지 솟아올랐다
꺼진다
분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나뿐이어서
내가 분수를 보지 않으면
분수는 낭비된다
물속에 희미한 빛이 있다
네가 낭비되지 않도록 너를 가만히 바라본다
떠나며 뒤돌아본다
수압이 강하여 부상의 우려가 있으니 접촉하지 마세요
분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이런 말은
작별인사나
안부 인사로 어떤가
우거진 길을 걸어나가
호두나무를 지나가
나무가 굽이쳐
썩게 놔두기로 한다
지나간 곳을 다시 지나가는 것은
일종의 복습이다
분수가 더이상 나를 보고 있지 않으므로
나도 얼마간 낭비되고 있다
_문보영, 「손실」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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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분수를 보고 걸음을 멈춘 적이 있나요?
저희 집 근처 공원에 있는 분수는 벚꽃이 피고 낙엽이 지는 계절에만 작동해서 바람에 날리는 물을 맞고 지나며 벌써 분수가 나오는구나 생각하곤 해요. 제가 걷기 좋은 그 계절에만 그 공원을 굳이 지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조용한 분수를 보면 ‘물을 틀지도 않을 거면서 왜 만든 거야?’, ‘다른 절기에는 트는 걸까? 아예 운영하지 않는 걸까?’ 생각하며 잠깐 멈추곤 해요.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분수를 보곤 합니다.
이 시를 읽곤 낭비되는 나에 대해 생각했어요. 내가 보지 않으면 낭비되는 분수처럼 분수도 나를 봐주지 않는다면 나도 낭비되고 있는 걸까? 오히려 힘껏 바라보는 것이 낭비를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닐까? 적당히 소비되기를 바랄 수도 있잖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흐르는 분수의 물과 우리의 시간처럼 ‘얼마간’ 낭비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기에 다다릅니다. 이 시의 제목이 손실이듯 우리가 알게 모르게 잃는 것에 대해 집중하게 되었어요. 그렇기에 더더욱 많은 것을 끌어안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일 년의 마지막 두 달을 연말로 명명하고 캘린더의 주말을 보고 싶었던 사람들의 이름들로 가득 채워뒀습니다. 내가 낭비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이 기간인지 이 기간 속의 나일지 사실은 알고 있어요.
하릴없이 찾아오는 밤은 낭비된 오늘이 아쉬운 탓에 반갑지 않은 것이겠죠. 토할 것 같이 바빴던 하루의 끝에 이 시를 만나 다행이에요. 어떤 것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모든 걸 끌어안은 사람처럼 열심히 들여다봅시다. 그런 우리에게 있을 손실이 무엇이든 아프지 않길 바라요.
오늘 제 글이 낭비되지 않도록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