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맘에 벌레 한 마리 놔드려야겠어요.
안녕하세요? ‘배기’의 이름을 가지고 자주 등장할 배기(바지) 인사드립니다.
저는 이번에 우.시.사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어찌 정민님의 새로운 사진이 뜰 때 보다 우.시.사를 재개한다는 소식에 더욱 가슴이 더 떨려오더라구요.
이런 저, 진정 어니스트 맞나요?
여튼 박정민 배우의 팬, 어니스트^^.분들은 가을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봄 다음으로 좋아하는 계절이 가을인데요. 여름 내 무한할 것 같은 생명력을 뽐낸 잎들이 알록달록한 채 버석버석 말라가는 풍경을 목격하노라면 제가 이 계절 안에, 시간 안에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해내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 참으로 신기한 가설이 있습니다. 상대성이론에 의거하여 시간은 인간이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허상의 이론에 불과하며, 시간과 공간은 사실 같은 개념이라는 것인데요. 시간이 그저 인간의 허상의 개념에 불과했다면, 우리에게 시대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럼 앞으로의 우리는 어느 시공간에다 좌표를 찍고 살아가야 하는걸까요? 과거-현재-미래를 소망하고 후회하며 내일은 더 나은 하루를 꿈꾸며 살아간 인류의 삶을 뒤흔들 아주 반항적인 이론인데요.
이 역시 가설일 뿐이니 저는 그냥 과학자님들끼리 흥미진진한 담론을 펼치시길 바라며 ,무수한 먼지 중 하나인 저는 그저 가설인 채로 엎어두고 살려고 합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가지 않든 시를 사랑(해볼까)하는 건 변치 않으니까요.
그리하여 여기 현재에 갇혀 사는 사람 한 마리. 아니, 벌레 한 마리를 모시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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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눈이 길들여질 무렵
마음을 뚫고 기어 나오는 벌레
자잘한 몸통에 달린 다리가 네 개, 여덟 개, 열 여섯개
반복적으로 증식한다
벌레는 이쪽으로 극적인 소폭을 움직이면서
수없이 출렁인다. 따뜻하게 검은 물방울
오랫동안 미워한 사람의 부고 앞으로
기어가는 침묵을 모사하는 벌레야,
너는 짓밟힌적도 부끄러워한 적도
없이, 살아나서 속죄양처럼 무모하다
구석으로 기어가 벽을 오르다가 죽은듯이 멈추어 서서
낮은 속도로 흘러가는 대낮을 다 받아낸 벌레가
다시 나에게로 다가온다
도망치다 꼼짝없이 주저앉는 나에게
벌레는 극적인 소포를 두고 내 앞에 멈추어선다
“검은물이 옮겨붙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벌레는 감히 약올리는 말을 건넨다.
“한방울밖에 안되는 주제에”
아까부터 벽시계의 침이 같은 자리를 착,착 닦고있다.
”덤벼봐. 덤벼봐.”
벌레를 머금고 벌레소리를 내면서
나는 벌레가 전부 닳을까봐 아슬아슬하다
‘벌레와 겨루기’
박유하, <신의 반지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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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집을 마주한 건 동네 도서관이었습니다. 문학동네 시인선 처럼 몸집이 긴 시집들 사이 딱 이 <신의 반지하> 시집만이 몸통을 반절 접은 채로 반지하 건물 마냥 끼여 있더라구요. 이를 보곤 왜인지 이 시집을 지상의 세계로 구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구원해낸 시집 속에서 두번째로 마주한 이 ‘벌레와 겨루기’ 시를 보고, 저는 한동안 시 속의 벌레를 경멸하는 화자가 되었다가 벌레가 되었다가 하며 벌레와 인간의 경계에서 한참을 헤매었는데요. 화자가 벌레와 겨루기를 하는 동안,
저는 이 시에서 벌레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를 겨루어보고 싶었습니다.
화자는 아마 마음 속의 벌레를 오랜 기간동안 미워했을 겁니다. 짓밟힌적 있고 부끄러워한 적 있는 누군가와 다르게 벌레는 다리를 증식하며 몸통만 불릴 줄 아는 놈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벌레는 미워한 이의 부고 앞에서 침묵을 모사하기도 하고, 내가 나의 처신을 잘 못한 사이 대낮을 다 받아내며 나 대신을 살아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시를 잘 읽어보면 이 벌레는 나와 다른 종족이 결코 아닙니다. 벌레는 어둠에 눈이 길들여질 무렵 마음을 뚫고 기어 나오는 벌레. 즉 내 마음 속에서 나온 벌레, 곧 ‘나’ 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읽고 보면 이 ‘벌레’란 화자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양심’에 가깝게도 느껴집니다. 그러니 그 양심이 “한방울밖에” 안된다고 부끄러워하고, 그 한방울 되는 벌레에게 찌질하게 “덤벼봐”를 외치지만 그 마저도 전부 닳을까봐 아슬아슬하게 되구요.
결국 “덤벼봐. 덤벼봐.” 하며 찌질하게 벌레에게 외치지만, 자신의 찌질함을 알고 걱정하는 것만으로 이 화자가 덜 너무한 인간 같게 느껴집니다.
벽시계를 착, 착 닦아내는 것만으로도 이 벌레가, 이 화자가 자신의 하루를 얼마나 곱씹고 뒤적여 얼만큼의 양심을 더 불릴지 고민하는 것 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저는 이처럼 자신의 찌질함을 알고 있는 자들이 참으로 좋습니다. 그런 점에서 정민님이 어느 인터뷰에서 본인을 찐따라고 표현하셨을 때 (...) 안쓰러운 마음이 들다가도 동시에 참 좋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찌질하다고 알고 있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진짜 찌질한’ 사람은 아니게 되니 말이죠.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찌질함을 알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많이 느끼는 요즘 입니다. 여러분들 마음 속에도 (되도록이면 앙증맞은) 벌레 한 마리씩을 키우시며 그와 자주 겨루는 날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러다보면 그 벌레가 더 좋은 벌레를(like 어니스트)끌고 우리의 세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올테니 말이죠.
-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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