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예진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어니스트 여러분과 함께 나눌 시를 고르고 이야기를 덧붙이니 새로운 마음이 들어요. 지난 초봄, 나의 글을 읽어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글을 쓸 때 부풀던 마음을 오랜만에 다시 느낍니다.
오늘 소개할 시는 지극한 사랑의 노래입니다. 조금 춥고 축축한 계절에, 명확히 정의내리기 어려운 계절과 계절의 틈새에 읽기 좋은 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며 검정치마 <THIRSTY> 앨범 속 곡들의 일관된 정서가 떠올랐습니다. 함께 들어보아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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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자장가> / 김개미
창문을 열어도 바람은 없단다
일주일이면 어떻고 한 달이면 어떻니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단다
눈을 감으렴
꿈속에서 찧고 까불고 날아다니렴
그림자만 밟아도 아프지 않니
먹어보지 않은 약이 없지 않니
고통이 너를 삼켜
참을 수 없는 날이 오면
내 깃털을 뽑으렴
비통에 젖은 노래만이 심장의 피를 돌린단다
햇살 한줄기면 된단다
그것만 쥐고 있어도 눈이 떠진단다
돌을 씹던 날들을 잊어라
배란과 배설이 너를 놓아줄 때까지
사랑이란 젖니처럼 쓸모없단다
낮과 밤이 없는 여기선
죽는 날까지 열이 내리지 않는단다
칼날 같은 눈빛을 쉴 수 없단다
그러니 아가야,
기타 소리를 들으렴
아직 따뜻한 내 심장을 쪼아먹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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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참으로 삭막합니다. 창문을 열어도 바람은 없고, 낮과 밤도 없고, 죽는 날까지 열이 내리지도 않지요. 이런 세상에서는 산다는 것이 어찌나 고행처럼 느껴질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다시 시를 곱씹어 읽어보면 문득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 같습니다. 나무 사이로 불어드는 바람과 계절의 결을 느낄 수 없는 도시에서, 낮과 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양 떠들기를 멈출 줄 모르는 스마트폰 안에서, 진심을 잃은 이야기들의 열기가 죽을 때까지 식을 줄 모르는 익명성의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뇌와 사색 없이도 삶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간편해진 현재에, 타인의 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아도 아무렴 어떻냐고 말하기 쉬운 현재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시의 제목에서 '재'는 재앙으로 인한 불운을 의미하는 한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재앙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행의 기운만이 남아 우리에게 섬찟한 자장가를 불러줍니다.
저는 이 불길 같은 재앙이 지나가 폐허가 된 자리를 떠올리다가 '재'를 조금 다르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보았어요. 불이 타고 난 자리에 남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그리하여 '재'에게 성질을 부여하면, 우리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화자인 재는 이 세상을 오래 산 존재일 것이라고 짐작하게 됩니다. 온건해질 줄을 도무지 모르고, 불길을 조절하며 따뜻함을 가져다주려는 시도는 해본 적도 없는 세상, 그렇게 활활 타오르기만 하다가 잔해만 남은 세상을 일찍이 살아본 존재이지요. 그리하여 결국 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막막하게 느껴지지만 다행인 것은 재로나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태로운 와중에도 아직은 형체가 있는 너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습니다.
재는 너를 위해 남은 자신의 부스러기마저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재의 자장가는 일종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림자만 밟아도 흠칫 아픈 연약한 너, 먹어보지 않은 약이 없고 고통에 삼켜질 때가 잦은 너에게 재는 살아남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아직 따뜻한 내 심장을 쪼아먹으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재는 자신이 고작 재인 줄로만 알았지만, 너를 위로해주다가 자신의 중심에는 사실 죽지 않은 불씨가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는 사랑이란 것이 젖니처럼 쓸모없으니, 너는 애써 할 필요 없지만 나는 그 쓸모없는 것을 하며 네게 나를 내어주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절절한 고백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재처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든든하겠습니다. 무엇을 도전하든 무엇에 지치든 무엇 때문에 혼자가 되든 두렵지 않겠지요. 그렇게 무너진 순간에 나를 다정히 불러주고 기타 선율을 들려줄 존재가 있다는 믿음이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에게 재가 되어주는 것도 기쁘겠습니다. 내가 아깝지 않을만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충만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돌아보았을 때 그 시절의 나는 마모된 채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뭉쳐있습니다. 정민을 있는 힘껏 사랑하다가 시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삭막한 세상에서는 재가 되는 사랑이 유일한 구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를 나누고 비슷한 영화를 보고 닮은 소설과 수필을 읽으며 서로 마찰하고 희미한 불씨를 자꾸 만들어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응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살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그렇다면 재가 되는 사랑만이 유일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건강하고 씩씩한 세상을 함께 만드는 방식으로 나를 갉아먹지 않고도 서로를 위로하는 사랑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확실해져서 여러분과 제가 구성하는 작은 세상의 진리가 될 때까지, 나눠주시는 것들을 잘 읽고 잘 나누기 위해 겸손해지겠습니다.
일교차가 심한 날이 계속됩니다. 겉옷 잘 챙기시고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