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하는 고백
안녕하세요. 냥입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이 봄에 정말로 안녕하신가요? 벚꽃 구경은 다들 잘하셨는지요. 눈길을 조금만 옮기면 반갑게 인사해 주는 희미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4월의 시작을 알립니다.
수험생에게 봄이 왔다는 건 학교를 열심히 가야 한다는 뜻이겠죠. 등교할 때마다 항상 대체 누가 왜 학교를 산에 지었냐고 500번씩 욕했는데, 막상 이럴 땐 혀를 쏙 내뺍니다. 역시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 등굣길이 한층 산뜻해졌습니다. 하얀 벚꽃 비를 맞으며 돌계단을 씩씩하게 올라 마침내 6층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곤…
창밖으로 벚나무가 보이는 빈 교실에 앉아 학생 신분에 걸맞게 곧 다가올 시험 준비를 시작합니다. 아침엔 역시 국어지. 수능 특강 문학을 끄적끄적 풀던 저는 제 눈앞의 벚꽃보다도 가슴을 뛰게 하는 시를 발견했습니다.
—
내 유년의 7월에는 냇가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 솟아오르고 또 그 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내려와 어린 눈동자 속 터져나갈 듯 가득 차고 찬물들은 반짝이는 햇살 수면에 담아 쉼 없이 흘러갔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착한 노래들도 물고기들과 함께 큰 강으로 헤엄쳐 가버리면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은 미루나무 손들을 흔들어 차르르 차르르 내 겨드랑에도 간지러운 새잎이 돋고 물 아래까지 헤엄쳐가 누워 바라보는 하늘 위로 삐뚤삐뚤 헤엄쳐 달아나던 미루나무 한 그루.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마 미루나무야, 귀에 들어간 물을 뽑으려 햇살에 데워진 둥근 돌을 골라 귀를 가져다 대면 허기보다 먼저 온몸으로 퍼져오던 따뜻한 오수, 점점 무거워져 오는 눈꺼풀 위로 멀리 누나가 다니는 분교의 풍금 소리 쌓이고 미루나무 그늘 아래에서 7월은 더위를 잊은 채 깜박 잠이 들었다.
-정일근, 「흑백 사진-7월」
—
실컷 봄 얘기, 벚꽃 얘기해놓고 왜 한여름 시를 가져왔냐. 실망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사실 여름이 더 좋아요.
봄은 봄 그 자체로도 좋지만, 여름이 곧 온다는 증거기도 하니까요. 이 설레임은 어쩌면 여름을 기다리는 내 가슴의 시그널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저는 가녀린 꽃보다 꼿꼿한 나무가 좋고, 포근한 분홍빛보다 청량한 초록빛이 좋아서 여름이 좋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푸른 잎들과 울창한 숲을 이루는 파아란, 시야를 꽈악 채우는 깊은 청색을 맞닥뜨릴 때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는 까닭입니다.
그저 글을 하나 읽었을 뿐인데 마음은 이미 뭉게구름을 타고 여름에 가 있습니다. 시인의 유년의 7월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빈 교실에서 홀로 중간고사를 준비하는 어떤 고등학생의 마음까지도 울립니다. 경험해 본 적 없는 시인의 여름이 고스란히 가슴으로 들어옵니다. 심지어 미루나무에 살짝 정이 든 것만 같기도 합니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달콤한 바람…. 스르르 감겨오는 눈과 배고픔보다도 먼저 찾아온 따뜻한 낮잠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풍금 소리.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들어버린 7월은 더위도 잊어버렸답니다.
그런 7월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인이 이때를 회상하였듯 저도 저의 7월을 회상합니다. 흐릿하게나마 여름의 잔상이 남아있습니다만 회색빛깔이 너무나도 많아 깨끗하고 맑은 여름은 저 아래 뜨문뜨문 떠오르기만 합니다.
아름다웠던 자신의 7월을 선물해 준 시인에게 감사합니다. 지금 어딘가에서 봄을 느끼고 있을 시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 어여쁜 광경을 조금이나마 마주하고 손잡게 해주어서, 미루나무를 떠올릴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 여름을 또 기다리고 온몸으로 기록할 결심을 했다고 말입니다.
냥 드림
—
추신
이 시가 너무 좋은 나머지 요즈음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이 시가 있는 페이지를 펴서 읽고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나 많이 봤는데 적어도 이번 국어 시험에서 이 작품만큼은 틀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결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