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
안녕하세요. 한발 늦었지만 2회부터 <어시사>의 필진으로 참여하게 된 한겨울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럽지만 처음이니만큼 제 이름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한겨울’, 제게 이러한 기회가 찾아온다면 꼭 한 번쯤 써보고 싶은 필명이었습니다. 이따금씩 주변에서 제게 물어옵니다. 왜 하필이면 겨울이냐고. 왜 조금 더 온화해 보이는 봄, 더울지라도 성격 좋아 보이는 여름 혹은 사계절 중 가장 있어 보이는 가을이 아니냐고.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리 성품 좋고 따스한 인격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겨울이라는 계절 속에서 긍정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또한 아닙니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그렇습니다. 겨울은 추워요, 너무 추워서 문밖으로 한 발짝 내딛자마자 육두문자를 절로 내뱉는 날들도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그토록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경험해 보았어요. 저는 종종 겨울 밤하늘을 새카만 도화지 삼아 숨을 크게 뱉어볼 때가 있습니다. 폐부 깊이 제 일부였던 숨이 구순 밖으로 터져 나와 하늘 위로 퍼져나가고, 동시에 점차 사라져갑니다. 그 순간, 저는 가장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많은 생명이 지고, 끝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계절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生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계절입니다. 이쯤에서 변주를 한 번 줄까요. 겨울이라는 계절 속에서 삶을 느끼는 것과 동등한 수준에 달하는 행위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이것이 오늘 제가 가장 하고픈 말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바로 호명입니다.
누군가의 이름 속에는 그의 삶이 담겨있습니다. 그만큼의 의미와 가치가 있고, 그것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수준이겠습니다. 남들의 이름이 그렇듯 나의 이름 또한 그러하겠죠. 상대방이 당신의 이름을 외워 불러줬을 때의 설렘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 설렘은 무의식 속에서 삶을 느끼는 방식이 되겠습니다. 저는 요즘 이를 체감하고 되뇌며, 보다 많은 이들이 본인의 삶을 느낄 수 있게 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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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화분이 몇 개 있다 그 화분들 각각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어쩌면 따박따박, 잊지 않고 잎 위에 내려앉는 햇빛이 그들의 본명일지도 모르지 누구든 자신의 이름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흠뻑 젖을 정도로 부어주는 물도 그들의 이름일 테지 흠뻑 젖고 아래로 쏟아낸 물을 다시 부어주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의 발을 보았다 거실의 부분, 환하다
_유희경, 「화분」(『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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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 있어서 햇빛과 물은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시인에 따르면 그것들은 곧 각자의 이름이 되고요. 이름이 되었기에 식물이 햇빛과 물을 받는 행위 자체를 호명과 연관 지어 볼 수 있습니다. 식물은 피어나고 지기까지 단 하루도 햇빛과 물을 거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그들의 삶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일을 호명 받으며 연명하는 생명체인 것입니다. 그렇게 곧 제 자신이 식물에 이입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매일을 알게 모르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갑니다. 제가 매일 어떻게 불렸던가 한참을 생각해 보니, 본명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불리는 호칭 또한 이름의 한 종류로 포함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식물에게 있어 세상을 살아가며 받은 햇빛과 물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는 것처럼요.
저와 같은 경우,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선생님들로부터 본명으로 불리고, 집에서는 모태신앙으로 타고나 태어났을 때 본명과 함께 붙여진 세례명으로 불립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직장에 다니게 된다면 직급 혹은 직책과 같은 호칭을 받겠죠. 이처럼 한 사람의 이름은 그가 있는 장소와 위치에 따라 쉽게 변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리 이름이 변한다고 한들 칭하는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식물들의 또 다른 이름인 햇빛과 물처럼, 그저 그 사람의 인생을 함축시켜 몇 자의 단어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재차 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부끄럽지 않을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 시의 ‘누구든 자신의 이름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에서 처음 그런 결심을 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후손의 이름 짓기에 굉장히 연연하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새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어 왔는데 이름점을 봐달라고 부탁한다던가, 동네에서 제일가는 작명소에 의뢰를 맡기기도 했다지요. 그렇게 지은 이름들은 보통 건강과 장수, 행복과 총명, 아름다움과 정절, 순정 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름처럼 살아줬으면 하는 염원이 담긴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편지를 읽는 당신의 이름도 그러할 것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도착하기 몇 달 전부터 당신의 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좋은 뜻의 한자를 발굴하기 시작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이름 공부를 하는 열혈 혈족·친인척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수고로 지어진 이름은 출생신고와 함께 정식으로 불립니다. 그때부터 이름에 담긴 의미가 가감되며 계속해서 변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곳에서 나타납니다. 어떤 순간엔 이름이 그의 얼굴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이름이 더럽혀져 있다면,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할 상황에 처한 것이겠지요. 제 이름도 누군가로부터 불려 그 음성을 들었을 때, 과연 부끄럽지 않을 떳떳한 삶을 살았는지 되돌아보며 반성하게 됩니다.
다방면에서 보았을 때 ‘한겨울’이라는 필명은 본명과 달리 제 숨을 담은 아주 깨끗한 이름이기에, 그렇게 불렸을 때 비로소 제 삶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도피처처럼 느껴질 것 같습니다. 직접 새로 칭한 이름이므로 ‘한겨울’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할 나날들은 그리 부끄럽지 않길 바라봅니다. 앞으로 저를 그렇게 칭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욕심 아닌 욕심도 조금은 부려 봅니다.
우리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것과 바라는 것들이 너무 많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이 벅차고, 예측 불가의 상황에 직면해 고개 숙이다 보면 어느새 하루의 끝에 서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끊임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하루들 속에서 단순히 서로의 이름을 칭하는 것만으로도 연명할 수 있다면, 저는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는 당신은 어떻게 불렸으면 하나요? 누군가 등 뒤에서 당신이 불리길 바라는 그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줬을 때, 그때 당신은 또다시 살아가는 것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한겨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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