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말지입니다.
저를 소개하는 이름이 본명 석 자가 아니라 닉네임이라니. 아직은 어색하기도 합니다.
첫 글은 근사한 시를 소개하고 싶어 졸업한 학교 도서관에서 시집 다섯 권을 빌려왔습니다. 책이라면 소설이나 산문집만을 종종 즐겨 읽었기 때문에 어떤 시집이 좋은지, 어떤 시인이 좋은지 시에 대한 취향이랄 게 딱히 없습니다. 박정민 배우를 필진으로 모셔와 ‘우시사’라는 소중한 편지를 선물해주고 있는 문학동네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문학동네시인선으로 5권을 꽉꽉 채워 빌려왔을 뿐입니다.
드라마도 무조건 1화부터 시청해야 하고, 책도 무조건 첫 장부터 펼쳐야 하는 고집스러운 제 시선이 무작정 집어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 가닿습니다. 조금 웃기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 먹고 자리에 앉아 첫 장부터 꼼꼼하게 읽다 발견한 시가 아니라 무심코 발견한 시가 마음에 와닿다니. 제 인생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저는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입시, 두어 번의 인턴 취업처럼 인생의 큰 부분은 물론 일상의 사소한 것들 조차도요. 인생도 사람도 사랑도 흘러가는 대로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이렇게 박정민 배우를 좋아하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시로 만나고, 그를 좋아하다 못해 그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려 이렇게 시를 읽고 직접 글을 쓰고 있네요. 꽤나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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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驛)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_박준, 「눈을 감고」(『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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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다는 게 이상합니다. 그 걸음을 기억하는 것이 기억력이 좋기 때문인지 잃었던 길에서의 기억이 좋았기 때문인지 따위의 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길은 더 이상 초행길이 아니기에 더 마음 편히 걸음을 옮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익숙함을 좋아합니다. 익숙함 속의 안정과 고요가 제 안의 저를 자라나게 합니다. 놀랍게도 최근에야 깨달은 사실입니다. 시끌벅적한 곳에서 얻는 에너지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내 안의 고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어지러운 저녁과 밤, 낮을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새겨진 기척들이 나를 지지하기도 지치게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느라 멈춘 발걸음은 사람을 사랑하는 힘으로 다시 시작될 듯합니다. 제가 늘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잃어버린 수첩을 찾는 길에 새로운 것들이 기록되기도 할 것이고 새 수첩에 그 여정을 이어서 기록하기도 할 것입니다. 인생은 걸음의 기록이기도 하니까요.
시는 추측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요를 멀리하려 했던 제가 시를 가까이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ㄹ 것 같다.’ ‘-듯하다’라는 어미가 많은 제 첫 글을 바라봅니다. 글을 쓰는 것도, 해석하는 것도 많이 미숙한 저에게 어찌보면 최선이겠지요. 앞으로 이 미숙함을 최선을 다해 뽐내보려 합니다. 추측이 확신이 될 때까지 제가 뽐내는 미숙함을 지켜봐 주시는 독자분들이 거기에 계속 계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지러운 저녁은 조금 쉬어가시면 좋겠습니다. 맛있게 먹은 저녁 메뉴를 제게도 공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기척이 느끼며 살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가보지 못해 잃을 수도 없는 이 길의 첫 걸음을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다음 걸음도 함께일 것에 미리 감사합니다.
함께일 것을 미리 확신하고, 미리 감사하는
거만한
말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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