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냥입니다.
지금은 감상에 젖은 글을 쓰기 딱 좋은 시각, 새벽 2시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읽으면 잔뜩 후회할 법한,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글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시간이죠. 아무렴 후회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글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특별한 날에 고작 새벽 감성이라는 조촐한 이유로 글을 쓰지 않는 것은 너무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탓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 시집을 또 한 권 읽습니다. 시를 읽으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짧은 시간 동안 시인은 기어코 제게 스스로 글을 쓸 용기를 주었나 봅니다. 드디어 다가온 소박하고 거대한 변화를 온 정신으로 느끼며 이 새벽을 함께할 시집을 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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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꿈을 들고서 강가에 서서
구르는 자갈처럼 치이다 보면
한끼의 굶주림이 주는 의미를
헌 철학 노트에선 찾을 수 없고
내, 꿈꾸어 오던 구름이 아닌
요깃거리를 위해
허둥대다 보면
낮은 꿈은 더 낮은 꿈이 되어
나의 얼굴 눈물빛 지우고 있다
어디로든 떠나고, 떠나야 한다
응어리진 설움을 삭일 때까지
낮은 꿈을 지우며,
더 낮은 꿈을 강물에 띄우며
나에게서 너무 멀리 있는 꿈.
이제는 잊으며 살아야 한다.
_서정윤, 「낮은 꿈을 들고서」(『홀로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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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다섯 장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차마 시집을 첫 페이지부터 느긋하게 읽을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아서 마음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어버린 바람에 ‘장’의 존재를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1장, 홀로서기. 2장, 어떤 우울한 날에. 3장, 아득한 날. 4장, 슬픈 시. 마지막으로 5장, 겨울 해변가에서. ‘낮은 꿈을 들고서’는 어디에 있을까요. 제 첫 예상은 제3장, 그러니까, ‘아득한 날’이었습니다. 강가에 서서 낮은 꿈을 지우고, 강물에 띄우고. 내게 너무 멀리 있는 꿈을 이제는 잊으려는 마음. 막연하게 흘려보내야만 하는 꿈들. 아득하고 아득한 먼 곳에 꿈을 보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런데 뜻밖에도 이 시는 ‘어떤 우울한 날에’에 수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울한 날에 쓰인 시라. 아니면 우울한 날에 봤으면 하는 시? 그러다 문득 시는 보통 우울한 날에 쓰이지 않던가, 라는 생각을…. 우울하면 글을 쓰고 싶잖아요. 적어도 저는 그래서요. 전 우울이 나쁜 것이라고 칭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점도 방금 발견했네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는 엄청난 장점이. 사람이 우울 그거 안 하고 살 수도 있나. 우울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날이 많다는 걸 깨닫고선 괜히 절 다독여줬습니다. 시인도 부디 그래 주었길. 우울로 만들어낸 행복도 행복이니 말입니다.
다시 시로 돌아가서, 글자 속을 거닐다 꿈꾸어 오던 구름은 고사하고, 눈앞의 요깃거리에 허둥대는 사람 하나를 발견합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익숙한 얼굴이 있습니다. 평범한 눈코입에 살짝 머리에 곱슬기가 있는, 살짝 까무잡잡하고 발 사이즈는 250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여자가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저는 빨리 떠나라고 자꾸 소리치고 싶어졌습니다. 여길 떠나서 모든 걸 잊고 새로운 낮은 꿈을 만들고, 또 지우라고. 어쨌거나 인간이라면 응당 돌아올 시간 속에서 특별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잊어도 자꾸만 다시 낮은 꿈들을 만들 것입니다. 내가 예언자도 선지자도 아니지만 내 인생 나만 살아봤는데 나 아님 누가 알아? 적어도 내가 아는 나는 이렇게 계속해서 치이다가 허둥대고 우울해하고 강물에 꿈을 띄우면서 살 거라고, 그렇게 믿습니다.
저는 시인과 함께 나아갈 겁니다. 우울한 날에 글을 쓰면서요. 우울한 시와 함께, 우울한 글과 함께 행복을 만들어 나갈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강물의 띄운 꿈이 다시 되돌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유치한 상상을 하면서 이 자리에 서 있으려고 합니다. 어느 먼 날 꼿꼿이 버텨내고 있는 저를 다시 만나길 빌어봅니다.
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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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여러분은 어떤 꿈을 강물에 띄우고 계시는가요?